이번 물결 가을호는 물살이 특집입니다. 수록된 전범선의 칼럼 <말이 먼저냐 생각이 먼저냐?>를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일부 발췌했습니다.
p. 112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선언한다. 여기서 "생각한다", 즉 코기토(Cogito)는 로고스의 다른 말이다. 이성이란 결국 언어다. 데카르트는 말 못하는 동물은 생각도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는 고장 난 시계가 삐거덕거리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인간은 비인간 동물을 함부로 대해도 괜찮았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은 기독교의 로고스 숭배를 근대적으로 계승한 것에 불과하다. 생각하기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씀과 같다.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고 언어중심적인 도그마(dogma)다.
p. 114
하지만 노자는 로고스가 곧 진리라고 보지 않는다.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지만 『도덕경』은 태초에는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노자는 언어로 진리를 담을 수 없다고 말한다. 도교에서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도(道)'라 한다. 힌두교의 브라만과 비슷하다. 그런데 도는 말하고 이름 짓는 순간 진정한 도가 아니다. 무한히 변모하는 것이 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과 글은 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된다. 노자는 애초에 책으로 진리를 전하는 것이 무모하다는 걸 알기에 『도덕경』의 첫머리에서 겸손히 알린다. '내가 앞으로 도에 관해서 말하겠지만,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 도란 이 책에 담겨 있지 않다. 언어의 영역 밖에, 자연에 있다.'
p. 116
변화무쌍한 자연의 순리를 말했던 노자에게서는 에콜로지(ecology)의 원형을 본다. 생명을 지배하고 통제할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도를 따르는 마음. 생태계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흐름. 부처의 해방이 무념무상이라면 노자의 해방은 무위(無爲)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한 가치다. 로고스를 중심으로 한 근대 서양 문명이 자초한 기후생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참조할 고대 동양의 지혜다. 물론 비거니즘과 에콜로지 모두 이즘(ism)과 로지(logy)인 이상 로고스의 산물이다. 불교와 도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과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라도 언어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 있어서 인류는 '도가도 비상도'라고 운을 떼었던 노자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과연 작금의 위기를 다른 이즘과 로지로 극복할 수 있을까? 로고스 중심주의를 타파하는 데 언어가 도움이 될까?
말과 글의 가장 본질적인 한계는 직선적인 사고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 반드시 생각을 한 줄로 나열하게 된다.
p. 117
로고스는 삼차원, 사차원적인 우주의 현상을 이차원적인 기호로 변환하는 도구다. 현상계의 무한한 정보를 인간이 소화할 수 있는 단위로 분류하고, 측정하는 능력이다. 덕분에 과학이 발달했고, 인류는 막강한 힘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제일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 제 아무리 주어, 목적어, 서술어를 나열하고 젠더와 시제를 구분하더라도, 우주는 본디 하나라는 것. 자연이 아닌 나란 없다는 것. 우리는 직선이 아닌 그물망으로 존재한다는 것. 모두가 주체이자 객체이며 시작과 끝이라는 것. 사방팔방 퍼져나가는 우주를 고작 일방적인 텍스트로 해석하는 일은 엄청난 비약과 생략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로고스를 초월하는 소통 방식이 가능하긴 할까? 인간은 다른 동물과, 식물과, 균과 대화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틀렸다. 비인간 동물도 분명 생각을 하고 고통을 느낀다. 그들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을 우리가 모를 뿐이다. 새는 춤을 추고, 고래는 초음파를 쏜다. 나무와 버섯도 땅속 뿌리와 균사체 네트워크를 통해 끊임없이 화학, 전기, 호르몬 신호를 주고받는다. 언어는 지구상의 무수히 다양한 기호 중 하나에 불과하다. 뭇 생명은 이미 각자의 기호로 교류하고 있다. 인간이 그들의 지혜를 배우지 못하는 것은 생각을 말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코기토의 오류다. 말하지 않는 비인간 존재도 생각하고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포스트휴먼 시대, 탈인간 중심적인 세계를 위해서는 다른 종과의 통신을 시도해야 한다. 동물의 권리를 보장하고, 숲과 연대하며 탄소를 절감하며, 버섯과 함께 오염을 정화하려면 말로는 부족하다. 그들의 의사 표현은 로고스로 표현할 수 없다. 비선형적이고 동시다발적이며 변화무쌍하다. 문자의 발명이 선사와 역사 시대를 구분했던 것처럼 인류세는 새로운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모드를 요청한다.
p. 122
비거니즘과 에콜로지,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모두 서양 근대 문명의 인간 중심주의를 탈피하려는 노력이다. 자크 데리다(Jaques Derrida)는 근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육식-남근-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정의한다. 육식주의와 가부장제 모두 로고스가 지탱한다. 지배구조의 언어는 촘촘히 얽히고 설켜있다. 이는 동물해방과 여성해방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모두 언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어의 태생 자체가 인간 중심적이기 때문에 언어를 통한 종평등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데리다가 말했듯이 우리는 언어로부터 해방되어야만 진정으로 동물해방이 이루어지는 걸까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종평등한 언어'라는 말은 모순적이게 느껴집니다.
전범선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뇌-뇌 인터페이스가 상용화되면 '느끼는 모두'가 텔레파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요. 만약 두뇌의 전기 신호로 심상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언어는 필요 없어지겠지요. 하지만 그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수많은 동물실험이 전제되어야 한다면 기술을 개발할 당위성은 퇴색될 것입니다.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타자에게 고통을 가해야 한다면 애초에 소통이라는 목적이 무색해지니까요. 따라서 불완전하더라도 우리는 말 그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타자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비폭력적으로.
“위험에 처한 삶의 불확실함을 알기 위해 상호 소통을 전제로 하는 언어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자기 자신만이 가진 언어로 이야기하는 얼굴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것이 우리에게 그런 연약함, 죽음을 담지한 얼굴을 알려주고 느끼게 해 줄 것일까요. 타자와 가까이, 인간적인 것 바깥에서 그들만의 감각과 메시지를 어떻게든 수신하려는 감수성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기의심, 침묵, 고통, 슬픔을 보유한 말하기를 통해서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동규, 에코 에쎄이, 2021)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종평등한 언어생활은 종차별적인 단어를 고치는 것을 넘어 타자의 얼굴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자기의심, 침묵, 고통, 슬픔을 보유한 말하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