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운동의 주요 과제는 지배 구조의 착취적인 언어를 바꾸는 일이다. 노동해방운동은 ‘근로자’가 아니라 ‘노동자’라고 외치고 여성해방운동은 ‘집사람’이 아니라 ‘배우자’라고 외친다. 장애해방운동은 ‘절름발이’, ‘벙어리’ 등을 비유적으로 쓰는 것이 장애를 비하한다고 지적한다. 오랫동안 널리 쓰이던 말을 그만 쓰자고 하면 불편하다. 그 말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라도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달가울 리 없다. 그 말을 쓰지 말자고 하는 사람은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사전에도 없는 낯선 말을 쓰면 소통이 어렵다.


백기완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았다. 평생 민족해방운동에 몸담으신 분이다. 외래어나 한자어 대신 최대한 순우리말을 쓰셨다. 그분의 말글은 내게 어색하다 못해 억지스러웠다. 노나메기(나눠 먹다), 벗나래(세상), 니나(민중), 비주(창조) 등 괄호로 설명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혼자서 이러시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런데 ‘동아리’, ‘새내기’, ‘달동네’도 당신이 꾸준히 써서 퍼진 거라고 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물해방운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바꿀 말이 많다. 예를 들어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거양득’이다. 돌을 하나 던져서 새가 두 명이나 죽으면 그게 이득인가 손해인가? 방금 비인간 동물을 ‘마리’가 아닌 ‘명’으로 수식했다. 왜 ‘이름 명’을 사람 셀 때만 쓰는가? 사전상 ‘마리’는 “짐승, 물고기, 벌레 따위를 세는 단위”다. 이름 있는 동물도 많은데 사람만 ‘명’이라 하는 건 종차별이다. 지금 워드 프로세서에 ‘종차별’을 썼더니 아래에 빨간 줄이 생겼다. 앞으로 인종차별, 성차별처럼 사전에 등재될 것이다.


육식주의적 언어는 인간의 인지 부조화를 지탱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을 먹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은 끔찍하다. 여기서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다. 그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둘을 언어적으로 구분한다. 살아 있는 동물은 소, 돼지, 닭, 개이지만 죽은 동물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개고기가 된다. “오늘은 내가 송아지 한 명 죽여서 줄게!”라고 말하면 소름 돋으니까 “오늘은 내가 소고기 쏠게!”라고 한다.


인간이 먹기 위해 굳이 이름을 에둘러 부르는 것은 동물이 유일하다. 버섯은 산에 있거나 식탁 위에 있거나 버섯이다. 바나나가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갑자기 ‘바나나 고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 돼지, 닭, 개는 죽는 순간 고기로 전락한다. 그래야 인간이 맘 편히, 살아 있는 그들의 고통을 상상하지 않으면서, 사체를 씹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고기’는 대체 무슨 말인가? 엄연히 살아 있는 존재를 ‘물고기’라 부르고, 죽으면 ‘생선’이라 한다. 해괴망측하다. 어류에 있어서는 한국어의 육식주의적 대상화가 특히 심하다. 그들의 삶을 오직 인간이 먹기 위한 것으로 정의한다. ‘물고기’란 비윤리적인 것을 떠나서 지적으로 게으른 표현이다. 육상동물을 다 ‘땅고기’라고 부를 게 아닌 이상 ‘어류’나 ‘수생동물’이 맞다. 후자를 순우리말로 하면 ‘물살이’다. 나는 이 말이 제일 좋다.


지난달 27일, 경남어류양식협회는 “양식어민 죽어난다”면서 살아 있는 방어와 참돔을 여의도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날 죽어난 것은 방어와 참돔이었다. 언론은 “물고기가 산 채로 던져져서 죽었다”고 보도했다. 피 흘리며 몸부림치다 질식사한 그들은 결국 고기가 될 운명도 아니었다. ‘물고기’도 ‘생선’도 아닌 존재들의 참담한 살해 현장. 다른 데는 몰라도 <한겨레>라는 해방적인 이름의 신문만큼은 그들을 ‘물살이’로 기록하고 기억해주길 바란다.


2021. 12. 13. | 전범선 밴드 양반들 리더·동물해방물결 철학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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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의 풀무질] 물고기가 아니라 물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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